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황제의 십자군 (Crusade of 1197) ==== 1197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살라흐 앗 딘의 사후 아이유브 제국의 상속 투쟁에 틈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성지 원정을 결정했다. 1197년 십자군 또는 황제의 십자군이라는 이 십자군은 1197년 8월에 첫 원정대가 아크레에 상륙했다. 그런데 지휘 계통이 없는 이 기사들은 시내에서 멋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이처럼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갈릴레아로 보내지지만 간신히 참사는 면했다. 9월 10일, 앙리는 이들의 구원군 파견을 명령하지만, 곧바로 아크레에 있는 자신의 궁전 창문에서 추락해 사망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대부분은 창문 또는 발코니에서 그가 추락했다고 전해진다. 스칼렛이라는 이름의 꼬마 하인도 앙리의 소매를 잡고 같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는 강건했던 왕과 비교하면 체구가 너무 가벼웠기에 돕지 못하고 같이 떨어진 것인지 이런 식으로 암살을 사주 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른 이야기로는 앙리가 군사 퍼레이드를 창문에서 보고 있다가, 피사 공화국의 일행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바꾸면서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어 버렸다고도 한다. 정확하게 무슨 상황이든 앙리는 살해되었다는 게 현재의 정설이다. 왕과 같이 추락하여 대퇴골을 골절한 하인은 외부에 왕의 변고를 알렸는데, 하인도 그 후 부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앙리가 아크레의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다음 여왕 부군 후보자로 이번 원정의 목표이자 갈릴레아 공작이었지만 지금은 영토를 잃어 가난한 라울 드 생-오메르가 언급됐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결정을 못 내리는 와중, 반격에 돌입한 이집트의 술탄 알 아딜에게 오히려 야파를 포위당하여 함락되어 버렸다. 이사벨의 네번째 결혼이 확실히 결정되지 못하자 9월 20일 아크레에 도착한 [[마인츠]]의 대주교 콘라트 폰 비텔스바흐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 키프로스의 국왕 [[애므리 드 뤼지냥]]를 제안한다. 애므리는 첫번째 아내인 에쉬바 디블랭과 사별했었기 때문에, 여왕인 예루살렘의 미망인 이사벨과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총대주교 아이마로 모나코 델 코르비치는 이 결혼이 교회법에 부합하지 않다고 언급하여, 티레의 대주교 요스시우스의 중재를 받아 애므리와의 협상을 시작했고 구색이 갖춰지자 총대주교의 반대는 철회되었다. 1198년 티레에서 애므리와 이사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애므리는 [[기 드 뤼지냥]]의 동생으로 1194년 형 기의 죽음으로 키프로스의 왕위를 이었으며 이 결혼으로 인해 예루살렘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 이사벨 1세 & 애므리 ''' 네번째 남편을 맞이한 이사벨은 예루살렘 여왕이기는 했지만 중세의 분위기 속에서 군림은 하되 직접적인 통치 전면에 서는 건 남편의 몫이었다. 키프로스 군대는 애므리의 통치 중에 예루살렘 왕국을 위해 싸웠지만, 전시가 아니면 애므리는 두 나라를 죽을 때까지 따로 관리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의 진정한 통합에는 그들 사이에 태어날 남자아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키프로스의 차기 군주 후보에는 아모리와 첫째 부인 에쉬바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앙리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왕국의 적장녀로는 이사벨과 두번째 남편 콘라드 사이의 마리아가 이미 크고 있었고, 그 뒤로 이사벨이 세번째 남편 앙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또 셋. 이러면 애므리와의 사이에서도 딸이 태어나봤자 계승 순위를 우겨 볼 어떤 여지가 없게 되는데, 애므리와의 사이에서도 최소 세 아이를 낳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이은 남자아이는 요절했던 모양인지 두 왕국의 통합은 1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 진다. 애므리는 그의 예루살렘 왕국 대관식 이전에도 아이유브 제국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고 있었고, 브라반트의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명령 하에 있던 독일 십자군과 연합했다. 그들은 10월 21일 알 아딜을 베이루트에서 철수시켜 점령했고, 기브레(Gibelet) 성을 탈환하여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육로 연결을 복원했다. 그들은 심지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며 토론을 포위하지만, 독일 십자군이 총사령관 [[하인리히]] 6세 황제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듣고 신성 로마 제국에 복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2월 2일에 포위를 해제했다. 1198년 3월 4일 애므리는 티레에서 4명의 독일 기사에게 공격을 당했다. 다행히 왕의 가신과 종자들이 그를 구원하고 4명의 기사를 생포했다. 심문 끝에 애므리는 주선자로 지목된 전 갈릴레아 공작 라울을 비난하고 재판없이 추방을 선고했다. 라울은 애므리가 불법적으로 자신을 추방하려 한다고 오트 쿠르에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자발적으로 왕국을 떠나 트리폴리로 이동하여 정착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트리폴리 백국의 종주권을 상실한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므리는 아크레에서 안티오키아까지의 해안에 대한 소유를 확보하고, 1198년 7월 1일 알 아딜과 휴전 협정을 체결한다. 3차 십자군과의 연장선 상에서 5년 8개월에 달한 십자군 원정은 승리로 마무리 했다. 이후 애므리는 1202년 초에 4차 십자군에서 떨어져 나온 300명의 프랑스 십자군 참가 희망자들과 도착한 르노 2세 드 당피에르(Reynald II de Dampierre)가 무슬림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라고 요구했을 때도 이슬람과의 평화를 유지했다. 결국 이들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위해 예루살렘 왕국을 떠났다. 그즈음 이집트의 한 에미르가 시돈 근처에 요새를 장악하고 예루살렘 영토에 대해 약탈을 단행을 했는데, 알 아딜이 에미르를 멈추게 했지만 아모리의 함대는 20척의 이집트 함선을 나포하며 알 아딜의 영역에 침입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알 아딜의 아들, 알 무아잠(Al-Mu'azzam Isa)은 아크레 지역을 약탈했다. 애므리의 함대는 곧바로 1204년 5월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Nile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을 손에 넣는다. 결국 애므리와 알 아딜의 사절단은 1204년 9월 6년 동안 새로운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알 아딜은 야파와 람라를 애므리에게 양도하고 기독교 순례자가 예루살렘과 나사렛의 방문을 그대로 허용하기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